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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밝은 밤/최은영 지음

by 소르방울 202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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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게 된 계기

 그럴 때가 있다.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예약 신청을 해두고 책이 오면 왜 이 책을 예약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예약을 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그동안 계속 연체되었나 보다. 그 덕분에 왜 이 책을 빌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폭포 속에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글을 읽어대고 있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정리하지도 않고 그냥 한도 끝도 없이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이 쓰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그때가 지금이길 바란다.

 

2. 밝은 밤

 책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광복, 히로시마 원자폭탄, 6·25전쟁을 거쳐 피란민의 삶에서 현대로 온다. 지연은 주인공으로 엄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자이다. 지연은 원가족 안에서의 결핍을 결혼제도로 도피한다. 하지만 남편조차도 외도로 그녀를 배신하고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떠나간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회령'이다. 그곳은 엄마가 그렇게도 싫어한 할머니가 있는 곳이기에 엄마에게 멀어지기 위해 회령으로 향한다. 우연히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오래 전에 만났던 할머니와 재회한다. 그동안 교류가 없던 것에 대한 어색함과 많이 지쳐보이는 지연에게 할머니는 그들과 상관 없는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은 증조할머니로 증조할아버지를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삼천에 살던 증조할머니는 백정의 딸로 백정을 나타내는 검은 표식을 저고리에 달고 기차역에서 과일을 판다. 양반집 하인이었던 증조할아버지의 조상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양민이 되는데 증조할아버지는 백정의 딸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증조할머니와 결혼한다. 당시 남편이 없는 여자는 일본군이 끌고 갔는데 증조할머니는 아픈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한 채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개성으로 향한다. 그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새비 아저씨인데 증조할머니는 새비 아저씨에게 그 어떤 것이든 해주리라 다짐한다. 일제의 수탈로 인해 빚이 늘어가고 개성으로 새비 아저씨네가 도망 왔을 때 증조할머니는 오랜 시간 굶주려 야윈 새비 아주머니를 살뜰히 챙긴다. 증조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백정의 딸이라고 업신 여길 거라 생각하지만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한 순간의 치기 어린 선택으로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증조할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백정의 딸인 아내를 원망하기에 증조할머니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증조할머니의 불행은 딸인 할머니에게도 이어진다. 새비 아주머니 역시 다정한 새비 아저씨가 있지만 집안 형편의 어려움 때문에 새비 아저씨가 일본으로 가게 되고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인해 병을 얻게 되어 기구한 삶을 살아간다.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 역시 어머니의 불행을 보며 자라난다.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우정은 깊었다가 또 서로에게 상처 주었다가 다시 보듬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도움을 주기도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서로의 삶에 위로가 되는 사람임은 변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피난길에 희자의 고모인 명숙할머니를 만나 바느질을 배워 살아갈 길을 찾는다. 희자는 공부를 하여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가 형, 동생하던 길남선에게 술김에 딸을 준다고 약조하여 길남선과 결혼하지만 증조할머니는 자신만 위할 줄 알고 할머니를 위하지 않는 길남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결혼생활 내내 할머니의 돈으로 남에게 아량을 베풀며 자기 위주의 삶을 이어가던 길남선은 북에서 결혼한 아내와 어머니가 찾아오자 그들을 따라 가버리고 할머니의 딸 미선을 본인 호적에 올림으로써 할머니의 존재를 부정하고 철저히 짓밟는다. 딸에게 통장하나 만들어주지 못한 할머니는 딸의 결혼조차 본인의 부족함에서 온 불행임을 인정하면서 딸과 멀어진다. 엄마의 결혼생활은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었고 못난 남편을 탓하기보다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 엄마는 지연의 언니인 정연을 잃음으로써 큰 상처를 받고 할머니와도 인연을 끊는다. 지연의 이혼을 부끄러워 하고 지연을 비난한다. 지연은 언니의 환영이 보인다고 했을 때 엄마의 모진 행동을 기억해내며 엄마와의 관계를 여전히 힘들어한다.

 지연의 교통사고로 인해 다시 만난 엄마와 할머니의 짧은 대면, 그리고 지연의 대전 발령으로 할머니와 헤어지는 서사 속에 지연이 본인과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할머니의 삶과 증조할머니의 삶, 그리고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삶은 도무지 행복해보이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부럽다. 옛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가 부럽고,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우정이 부럽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부정적으로 나오지만 새비 아저씨만은 새비 아주머니를 위하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 임종을 지킬 만큼 다정한 사람이다. 작가는 삶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 안에 보석들은 숨길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삶은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슬로건에서 벗어나 삶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군데군데 숨쉴 구멍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3. 책을 덮으며

 여자들의 우정이란 무엇일까. 증조할머니와 새비아주머니의 인생은 기구하나 그 둘의 만남은 아름답고 귀하다. 부모나 남편, 형제, 자식이 해주지 못한 그 어떤 부족한 갈증을 채워준다. 생각만 해도 힘이 되는 사람, 아무리 밀어내도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과연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 사람을 찾았다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기를 바라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꼭 그런 보석 같은 인연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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