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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피프티 피플/정세랑 지음

by 소르방울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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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전에

'피프티 피플'은 최근에 읽은 '빛과 멜로디'에 나온 책 제목이다. 전부터 정세랑 작가의 책을 읽고 싶었는데 병원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해서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보았다. 참 웃긴 게 책 제목만 아는 것과 어떤 내용인지 한 줄이라도 들어보면 상상하는 이미지가 확 달라져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제목에서 보듯이 50명의 사람들이라니 옴니버스식이라고 쳐도 대규모의 옴니버스이다. 주인공이 없는데 이야기가 한 곳에 모이고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기억해내기엔 삼국지 급이라서 단편소설이겠거니 싶기도 했다. 작가는 어떻게 점으로 이루어진 이 인물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2. 피프티 피플

병원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의사, 간호사, 병원직원, 헬기운전자 등)이 전반부에 가득 나오므로. 그런데 반전은 병원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모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관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옥상으로 대피하고 결국 헬기로 모두를 이송하여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나는 왜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죽은 사건들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가습기 살균제로 누나를 잃은 '한규익'. 작은누나는 홀로 큰누나의 죽음에 항의한다. 작은누나는 딸기를 주겠다며 규익을 불러 이런 말을 한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274쪽). 그 말이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가족이 죽으면 왜 죽었는지 죽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곱씹게 된다. 한 달일 수도, 1년일 수도, 더 오랜 시간일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슬픈 건 내 마음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삶에 치여 그냥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생각하고 가족을 보내주고 싶어지는 나약한 마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억울한 죽음은 나 대신 아무도 목소리를 내어주지 않기에 소송을 하고 시위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보내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습기 살균제의 가족들도, 세월호의 가족들도 대단하게 느껴지고 그들처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처럼 용감하게 내 삶을 바쳐 투쟁하지 않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오정빈'과 '정다운'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므로 더 뼈아팠다. 정빈이의 눈에도 다운이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운이는 씩씩하다. 아픈 정빈이의 아버지를 고쳐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빈이뿐만 아니라 나도 감동받았다. 그런 다운이의 어머니는 현실을 비관해(감옥에 간 남편, 아픈 신생아 둘째) 일가족 자살을 선택한다. 오늘은 학교를 가지 마라고 하는 엄마에게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라며 씩씩하게 말하는 다운이를 보고도 다운의 엄마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지 못했을까. 엄마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지만 삶은 다운이의 편이었고 일산화탄소 중독인 엄마를 병원으로 이송한다.  
'강한영'은 살아오면서 폭력적인 남동생(강한정)에게 숱하게 맞는다. 부모님은 동생을 제지하지 않았다. '누나가 참아야 하니까, 남자애들은 원래 그런다니까'(87쪽)라는 말 속에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정상인 줄 알았다고 한다. 결국 공무원 아버지가 받은 뇌물을 조금 챙겨서 자취방을 얻어 친구 '지지'(지연지)와 독립한다. 다친 딸을 보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때 아들이 그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는 아버지는 과연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까. 그러한 아버지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떠나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연민하는 강한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배윤나'는 싱크홀에 빠졌다가 살아난다. 시어머니 '최애선'에게는 털실 인형같은 며느리이자 '한규익'의 대학 교수님이자 시인이다. 긍정적인 그녀도 사고 앞에서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싱크홀에 빠진 사람이 살아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오토바이로 생업을 하다가 싱크홀에 빠진 가장의 뉴스를 본 것이 떠올랐다. 하루 아침에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는 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이것이 끝이 아니라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3.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은 뭐랄까 커다란 신문을 펼쳐서 보고 덮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에 가지각색의 사람들.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웃들. 그들이 영화관에 모인 장면을 보며 '대구지하철참사 기억공간'에 갔던 경험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들은 각각의 사연도 기구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목숨들이다. 책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고 모두 구조됐다며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죽고, 다치고,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닐까. 나는 그들의 삶을 모두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힘내라고, 나 역시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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